이 내용은 1996.3.18 부대신문에 실린 사회학과 김성국 교수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
<아나키'환경'공동체>
김성국 외 6인 엮음
국내외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고조되고 있다. 20세기의 중반에는 '죽어가는' 사상으로 치부되던 아나키즘이 왜? 다시? 인구에 회자되며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의 하나로서 우리는 <아나키'환경'공동체>라는 한권의 저서를 내놓게 되었다. 그동안 한낱 지적 에피소드로만 알려져 있던 아나키즘을 새로운 논리로 다듬어, 현대 산업문명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위기를 진단하고 처방하려는 이 책은 현재 한국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신사회운동에 신선한 자극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나키즘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허무적인 테러나 극단적인 파괴주의로 각인되어 왔다. 그러나 혼란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라는 도식은 진실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언제나 창조적 파괴로써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고자 하였고, 테러주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취해진 예외적이고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와 같은 평화주의적 아나키스트도 있지 않았던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절대적 독립주의에 기초한 무장 투쟁노선을 누가 감히 테러주의라고 폄하하겠는가? 우리 저자들은 이 책에서 아나키즘을 맹목적인 무정부주의, 극단적 이상주의, 허무적인 파괴주의, 소시민적 반동주의로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나 부르죠아지의 악의에 찬 왜곡에 불과하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아나키즘 연구서라는 학문사적인 의미 말고도, 외국의 아나키즘 이론을 단순히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명적-체제적 한계상황에 대응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외국의 이론이나 사상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한국의 지적 풍토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저자들은 한국 고유의 아나키즘을 정립해 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현대 아나키즘의 부활을 현대문명이 직면한 총체적 위기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주지하듯 오늘날 전세계는 세기말적 불안과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21세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키우면서 새로운 사회형성의 가능성을 그 어느 때 보다도 갈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의 발전을 위한 이념적 지주로서 자본주의의 마술과 사회주의의 신화는 이미 퇴색하였다. 사회민주주의조차 복지국가의 한계와 허구성이 드러남에 따라 대안적 사회체제로서 실격되어 버렸다. 요컨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을 비롯하여 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 성과 인종의 문제, 전쟁과 폭력의 문제와 같은 현존하는 사회적 모순들을 이론적으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대안적 이념으로서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적인 경쟁논리 대신에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제안하며, 형식적인 대의제 민주주의나 프로레타리아 계급(독재)주의 대신에 민중과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주의(Libertarianism)적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나아가 폭력과 억압에 기반을 두는 모든 강권적이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지배 대신에 권력의 철저한 분산을 추구하는 소규모 지역단위들의 자발적인 연합사회를 지향한다.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하여 3부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하는 제 3의 길"로서 아나키즘의 역사적 재등장을 설명한다. 특히 아나키즘과 신사회운동과의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 운동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협동조합 및 상호부조운동, 작업장에서의 자주관리운동, 생태환경 및 평화운동 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가체제의 연방주의적 개편, 지역공동체운동의 활성화, 시민불복종운동의 정당성 확보 등을 새로운 과제로서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존의 시민운동과 아나키스트운동을 접맥시킴으로써 개량화되기 쉬운 시민운동에 급진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부와 2부는 각 고전적인 아나키즘이론(푸르동, 바쿠닌 그리고 마르크스 대 바쿠닌)들과 현대 아나키즘의 사회경제이론(크로포트킨, 북친, 신채호의 사상과 자유교육사상 및 녹색경제론 등)을 소개하고 있다. 3부에서는 아나키즘 예술론이 폭넓게 논의된다.
이제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봉건사회를 허물고 등장한 근대국민국가는 "군대와 경찰의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공장의 굴뚝"으로부터 창출된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렇지만 미래의 정보시민사회에서는 중앙집권적 거대 권력은 반드시 해체될 것이다. 현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넷은 "어느 누구도 지배하지 않으나, 서로 자유롭고도 풍요롭게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는 아나키스트 사회"의 모형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제 아나키즘은 허망한 꿈이 아니라 정보화사회의 도래와 함께 현실적 유토피아로서 구체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강권적, 폭력적, 억압적인 국가와 정부를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무정부주의이다. 그렇지만 우리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또다른 정부가 있을 수 있다.
여러분, 지금 당장이라도 아나키즘의 광활한 세계에 뛰어 들어, 고대 노장사상으로부터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산 정약용의 여전제로부터 스페인 몬드라곤의 대실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결로부터 아나-보르의 문학논쟁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지적체험과 실천적 정열을 습득하지 않으시겠습니까?